History
1905년 가을,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William R. Smith가 내한하였다.
그는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평안남도 순안에서 교육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단 지도자들은 학교를 일본에 설립하고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하는 방안을 고려하였으나, 스미스와 조선 교인들은 조선의 복음화와 근대화에 기여하기 위해 조선 땅에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여기에 특별한 소명을 따라 내한한 미미샤펜버그 선교사도 합류하여 교육사업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헌신하였다. 지역 유지의 도움으로 순안에 부지를 확보하고, 재림교회 본부의 지원을 받아 기와집 일곱 칸 규모의 건물을 세워 교회와 민족을 위한 사역자 양성 기관을 설립하였다.
이후 미국의 Riley Russell 의사가 합류함으로 일곱 칸짜리 작은 학교는 남자 교실, 여자 교실, 예배실, 인쇄실, 진료실로 알차게 구성되어 교육과 의료, 출판사업의 시초가 되었다. 이 학교가 오늘날 삼육대학교의 뿌리가 되었다.
교육 및 선교 사업이 발전함에 따라 의명학교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조선 미션이 조선대회로 승격되고, 동아시아연합회의 조직과 함께 본부가 서울에 설치되면서 신학 교육을 받은 목회자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이에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1917 년 7월 25일 대회평의원회에서 의명학교내 2년제 신학교 설치를 결의하고 11명의 학생 입학을 허가하였다. 그 결과 1917년 9월 1일, 의명 학교의 한 교실에서 신학교 과정이 시작되었다.
의명학교에서 병설 운영되던 신학교는 1931년 4월 서울로 이전하여 ‘조선합회 신학교’라는명칭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분단 이전에 서울로 이전함으로 선교사업 확장과 고등교육 발전을 안정적으로 이어 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시기의 신학교는 교회 사역자 양성을 목표로 전략적으로 운영되었다. 합회 평의원회가 필요 인원을 결정하면, 교육·출판· 의료 등 각 분야에서 사역하던 인재를 선발하여 전원 장학금으로 교육하는 체계적인 방식이 도입되었다.
세계 경제대공황과 일본의 종교정책이 점차 억압적인 기조로 전환됨에 따라, 신학교는 임시 휴교 후 통신교육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후 1937년 1월 합회 평의원회는 통신 교육을 다시 학교 형태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명칭을 '사역자 양성소'로 정하였다. 1937년 5월 개교한 양성소는 1942년 5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까지 5년 간 활발한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역자 양성소가 운영되던 시기는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교육 기관을 탄압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도 교육을 이어 가던 사역자 양성소는 1942년 3월, 제11회 졸업식을 마친 뒤, 같은 해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다. 당시 일제는 교과서와 강의가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폐교의 명분으로 삼았다.
1945년 해방이후, 우리민족은 국가 재건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안게 되었고, 교단 역시 교회와 교육기관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과제는 사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의 재건이었다. 폐교 이후 5년 4개월이 지난 1947년 5월, 초· 중등학교와 함께 합동 개교식을 거행하며 교육 사업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해방직후의 어려운사회, 경제적 상황과 교단의 재정적 한계로 인해 교육은 1년 만에 다시 중단되었다. 이후 원동지회와 대총회 지원을 통해 학교 부지 매입이 추진되었고, 1949년 10월 서울 본부 교회에서 임시로 재 개교하였다. 이로써 삼육교육은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교육 사업의 확장과 안정적 기반 마련을 위해 교육부지 확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제임스 리 교장과 이여식 목사는 태릉 일대를 답사하던 중 지역 유지였던 엄씨룡씨의 소개로 현재 삼육대학교 캠퍼스가 위치한 오얏봉 언덕을 발견하였다. 그 때의 상황을 삼육대학교 개교 90년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면을 둘러보니 천보산 기슭의 아름다움에 '아! 바로 이곳이다' 라고 감탄을 발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들은 그 땅을 삼육 교육을 위한 축복의 장소로 확신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 지도자들은 1948년 7월에 구황실로부터 부지 21만평을 매입하여 본격적인 학교시설들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육사 입구(화랑역)에서 학교까지 직접 길을 내고 실업관, 사택, 종합 교사 등의 건물들을 지어 본격적인 삼육동시대를 열었다.
삼육동시대를 연 직후,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삼육교육은 다시 한 번 시대의 격랑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학교는 다시 한번 휴교에 들어갔고 캠퍼스는 북한군에 점령당하여 공산주의 혁명을 가르치는 교실로 또 인민군 병사들을 훈련하는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서울 수복으로 학교를 회복하였으나, 전황의 악화로 교육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전세가 안정되자 1951년 11월 15일, 신학교가 재 개교하였으며 이 시기에 '삼육신학원'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전쟁 속에서도 미래의 지도자 양성을 위해 6명의 학생을 미국 유학생으로 파견하는 등 교육 사업은 중단 없이 지속되어 갔다.
전쟁 이후 삼육신학원은 교육 재건과 발전을 위해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1954년 7월, 문교부로부터 4년제 각종학교 인가를 받아 정식 고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학점제와 1년 2학기제 도입 등 선진적인 학사제도를 확립하고, 교수진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학위 취득을 지원하였다. 또한 전쟁으로 훼손된 시설을 복구하고 기숙사, 강당, 본관, 목장, 과학관 등 다양한 교육 시설을 확충하였다. 이러한 혁신은 한국교육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많은 대학과 교육 관계자들이 이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삼육신학원은 1961년 2월 2일, 문교부로부터 정규 4년제 신학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삼육신학대학’으로 개칭하였다. 이 시기에는 학생자치기구가 조직되고, 교훈(진리·사랑·봉사), 교가, 교표가 제정되면서 대학의 정체성이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다. 또한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한 주요 시설 확충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행정관과 기숙사(백합사·동명사), 도서관, 고등학교 교사, 온실, 봉사문, 사택 등이 신축되며 대학 운영과 교육 기반이 한층 강화되었다.
6·25전쟁 이후 미국을 비롯한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던 원조 물자가 점차 줄어들면서, 우리나라는 자립적 경제 체제를 확립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국가 전반의 경제 여건은 어려웠으며, 삼육대학 또한 지원자 감소에 따른 재정난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육대학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학과를 증설하고(1967년 영어영문학과, 1973년 간호학과), 연구 활동을 활성화하며 장학 제도를 확충하는 등 교육 사명을 흔들림 없이 이어갔다. 또한 목장과 우유 처리 공장을 고도화하고 유제품을 제조·판매함으로써 대학 재정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와 함께 주요 교육 인프라도 확충되었는데, 1970년에는 가정교육관이, 1971년에는 엘리야관이 준공되었으며 다양한 교육 시설과 기자재 역시 지속적으로 보강되었다. 한편 당시 정부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실업계 고등교육기관의 육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삼육대학은 1973년, 훗날 삼육의명대학의 전신이 되는 삼육기술전문학교를 설립하며 시대적 요구에 적극 부응하였다.
이 시기는 한국 사회가 1960년대의 절대빈곤을 벗어나 경제적 자립 기반을 마련해 나가던 때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삼육대학은 교단의 발전과 국가 성장의 잠재력에 힘입어 본격적인 확장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기간 동안 다수의 학과가 신설되고 학생 수 또한 크게 증가하였다.
1978년에는 경영학과가, 1979년에는 약학과가 신설되었으며, 1981년에는 영양학과·화학과·음악교육과가 새롭게 개설되었다. 같은 해 대학원도 설립되었다. 그 결과 1981년 재학생 수는 1,063명에 이르러 ‘1,000명 시대’를 열었고, 불과 5년 뒤인 1986년에는 1,828명으로 증가하여 2,000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또한 대학의 핵심 기능을 담당할 대규모 건축물들이 잇달아 건립되었다. 1980년에는 선교70주년기념관(대강당)이 준공되었고, 1984년에는 도서관과 유가공실습장이 완공되었다. 이어 1985년에는 정문, 학생회관, 과학관, 에스라관 등이 들어서며 캠퍼스의 비약적인 확장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우리나라는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0%를 상회하는 고도성장기에 있었다. 이러한 국가적 성장과 함께 한국 재림교회와 삼육대학 역시 본격적인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개교 85주년을 맞이한 1991년 당시, 삼육대학은 병설전문대학 및 간호전문대학과 함께 총 16개 학과에 4,000명 이상의 재학생을 보유한 중형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76명의 교수와 59명의 사무직원, 그리고 실업교육부와 대학식품 부문에 92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주요 교육 및 생활 시설도 확충되었다. 1986년 행정관, 1987년 남녀 신기숙사, 1991년 선교90주년기념관(다목적관)이 건립되며 교육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아울러 학문 분야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1987년 생물학과와 원예학과가 신설되었고, 1988년에는 신학대학원이 설립되었다. 이어 1991년에는 박사과정과 재활치료학과, 낙농자원학과 등이 개설되면서 삼육대학은 종합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대학의 양적·질적 성장에 발맞추어 삼육대학은 1992년 교명을 ‘삼육대학교’로 변경하고, 종합대학에 걸맞은 학사 운영 체계를 확립해 나갔다. 또한 1993년에는 평생교육원을 개설하여 재학생은 물론 지역사회 일반인에게도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후에도 학과 증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93년 사회복지학과가 신설되었으며, 1995년에는 경영정보학과와 전산통계학과가 개설되었다. 이어 1997년에는 영어영문학과 야간과정, 환경디자인원예학과, 생활체육과학과가 신설되었고, 1998년에는 기독교상담학과가 새롭게 문을 열었다.
교육 시설 또한 꾸준히 확충되었다. 1997년에는 바울관이 건립되었고, 1998년에는 유치원 및 사회교육원이 설립되었다. 이어 1999년에는 제1·제2실습관이, 2000년에는 제2과학관과 신학관, 체육관 등이 완공되며 교육 및 연구 환경이 한층 강화되었다.
삼육대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며 대학 발전의 청사진을 구체화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2002년에는 대학 이미지 혁신을 목표로 새로운 UI를 개발하고, 중장기 발전계획과 특성화 전략을 수립하였다. 이어 2006년에는 급변하는 교육환경에 대응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오랜 연구와 논의를 거쳐 삼육대학교와 삼육의명대학의 통합을 이루었다. 특히 2006년은 대학 통합과 함께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뜻 깊은 해였다. 삼육대학교는 이를 계기로 ‘삼육교육 100년 역사 정립’, ‘정체성 확립’, ‘21세기 비전 제시’, ‘지역사회와의 공동 발전 모색’을 핵심 방향으로 삼아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도 교육 인프라 확충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2003년에는 남녀생활교육관(시온관·에덴관)과 생활관 식당이 건립되었고, 2004년에는 동물사육관이 완공되었다. 이어 2007년 백주년기념관, 2008년 음악관, 2009년 제3과학관이 건립되었으며, 2012년에는 안면도 인성교육수련원이 조성되었다. 이후에도 2014년 뉴스타트 연구동, 2016년 다니엘관·요한관·박물관, 2020년 브니엘관 등이 차례로 건립되며 교육 및 연구 환경의 현대화와 캠퍼스 확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변화와 혁신의 주기가 짧아지고, 안팎의 교육환경 또한 급변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120년을 이어온 삼육대학교의 교육 사명은 시대와 변화의 흐름을 넘어 지속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삼육대학교는 AI 혁신이 교육과 행정의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대학 조직 체계를 창조적으로 재구조화하고 있으며, 단순한 학생 유치를 넘어 ‘글로벌 교육적 공헌’이라는 새로운 국제화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AI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영적 소양과 인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사람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삼육대학교의 설립 정신을 이어가고자 한다.